무료 심리 상담가 글쓰기

 

 

현재 시각 새벽 3 25. 한참 자다 일어 알고 깨어 시계를 보았을 때는 새벽 1 2 이었다. 이후로 잠이 오지 않아 깜깜한 , 메트리스에 누워 유튜브를 듣다가 그래도 잠이 오지 않자 부엌에 있는 아로마 떼라피 알약을 삼키고 올라 왔다.

 

잠을 충분히 자야만 다음 피곤하지 않게 일을 하는데 글을 쓰고 잠을 청해야 겠다. 잠이 오지 않아 인터넷 뉴스를 보는데 미주 한인 자살자가 크게 증가했다는 기사가 떴다. 특히 젊은 나이층이 급증했다고 한다. 역시 예전 힘든 시기에 자살충동을 많이 겪었다.

 

때에는 이리 마음이 힘들었는지 걸핏하면 우울했고 번민했고 괴로웠다. 한창 예민하던 2, 때부터 글을 쓰게 것도 괴로운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글로 옮기고 나면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정리가 느낌이었다.

 

너무 힘이 들면 글도 써지지 않는다. 그래도 라도 꺼내 놓으면 글자로 나타난 마음을 눈으로 확인 하게 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게 된다. 만약에 마음이 힘든 상황에서 그저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괴로움에 파묻히게 되지만 힘든 마음을 글로 정말 힘들다.” 이렇게 라도 끄집어 내면 힘든 마음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백문이 불여일견. 듣는 보다 보는게 낫다. 라고 하지 않는가. 만큼 본다라는 행위는 현실적이고 실재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에는 본다라는 표현이 많이 스며있다. 예를 들어, “맛을 본다.” 라든가. “시험을 본다.”라든가. 맛은 미각이고 혀는 보는 기능이 없음에도 본다라고 한다.

 

그만큼 보는 행위는 느낌을 대표하는 감각이다. 나의 괴로운 마음을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마음을 글로 표현해 보는 것이고 글이 시각으로 느껴 졌을 괴로움은 눈을 통해 걸러져 마음에 다시 들어온다. 글로 놓기 전의 마음과 글로 놓은 마음은 질적으로 다르다.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이 심리 상담가를 찾아가는 이유는 나의 괴로운 마음을 상담가에게 말로 풀어 내고 상담가로부터 피드백을 받으며 마음에서 벗어나는 어떤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한 맥락에서 글은 내가 나에게 스스로 하소연 하고 스스로 피드백을 생산한다. 글을 쓰면서 이미 피드백이 꼬리를 물고 쓰여지는 것이다.

 

한인 젊은층에서 자살자가 급증했다는 소식에 얘기 같지 않고 나의 괴로웠던 예전 기억이 올라 생각을 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는가. 글로 표현한 마음을 다시 눈으로 보았을 글과 마음 괴로움이 망막에서 산란하며 마음에 긍정적인 변화의 파장을 일으킨다면 글쓰기는 과연 아주 저렴한 게다가 효과적인 심리 상담가가 아닐 없다.

 

----

2019. 7. 10 [4:07 AM]

'짭짤한 문학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과에서  (0) 2019.09.22
천생연분이란 정해져 있는가?  (0) 2019.07.15
무료 심리 상담가 - 글쓰기  (0) 2019.07.10
멀쩡한 우체통을 뽑으라니  (0) 2019.07.01
그 판매원 누나의 진심  (0) 2019.06.30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은 이유  (2) 2019.06.25

 

멀쩡한 우체통을 뽑으라니

 

 

우리집 앞길은 우리 동네(Subdivision)에서 차들이 가장 빠르게 달리는 직선도로이면서 내리막길이다. 번이나 우리 우체통이 내려오던 차에 의해 박살이 적이 있다. 그래서 다른 우체통을 새로 박았다. 이후로 동안 없이 우체통은 굳건히 있다.

 

그런데 2 , 동네 사무실에서 우리 우체통의 모양이 동네 표준과 다르다고 바꾸라는 이메일이 왔다.  우리는 누가 신고를 했는지 짐작할 있었다. 옆집 흑인아저씨가 귀뜸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옆에 옆에 집에 사는 어느 은퇴한 백인남자가 우리 집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오래 , 뒤뜰에 (Deck) 만든 적이 있는데 철거하라는 신고가 있었고 얼마 전엔 동생이 고기를 굽기 위해 뒤뜰에 돌로 만든 그릴을 설치해서 불을 피우는데 소방차가 달려 적이 있다. 그러나 소방대원들은 별거 아닌 약간의 주의사항만 일러주고 돌아갔다.

 

최근엔 잔디를 깨끗하게 깎지 않았다고 신고가 들어와 다시 깎은 적도 있다. 이렇게 사사건건 신고를 하니 이웃 남자는 우리를 싫어하는게 분명했다. 동양인이 이웃에 사는게 싫은데 더군다나 주위를 자기처럼 깔끔하게 놓고 살지 않으니 더욱 미운 것이다.

 

 

오래 전엔 우리 대문에 날계란 여러 개를 던져서 청소하느라 욕봤다. 이런저런 지난 일들을 생각할 단지 우리집이 깔끔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양인이기 때문에 싫은 티를 내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우리가 우리집을 깔끔하게 관리하지 못한 잘못도 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이웃의 삐뚤어진 마음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번 우체통 신고는 너무 하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네 규정을 읽어보니 우체통에 관련된 사항은 없었다.

 

 그러나 이웃이 신고한 이상 생니를 뽑아 멀쩡한 우체통 뽑아 내야할 판이다. 앞으로도 무슨 꼬투리를 잡아 신고할지 걱정이 된다. 같은 이웃끼리 대개 인사하며 없이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는데 골치 아픈 이웃이 우리 집을 노려보고 있다.

 

우리는 아직 우체통을 뽑아내진 않고 어떻게 하면 우체통을 살려 있을지 궁리 중이다. 다른 우체통과 같은 검은 색의 크게 다르지 않은 우체통을 뽑아낸다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다.

 

은퇴하고 없는 남자는 집을 깔끔하게 가꾸며 여생을 사는 반면 하루 종일 일하다 들어오는 우리로서는 관리 하는데 남자 만큼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무래도 음식이라도 해서 남자집에 찾아가 악수를 청해야 겠다. 어떤 음식이 좋을까? 그래. 엿이 좋겠다.

 

----

2019. 6. 30

 

그 판매원 누나의 진심

 

 

중학교 1학년, 아주 어리지만도 그렇다고 성숙하지도 않은 시기,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나는 사소한 장난으로 손가락에 상처가 났지만 그냥 그대로 둔 채 친구들이랑 선물가게에 갔다. 여기저기 손님을 끌려는 판매원 누나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지갑에는 삼 천원이 접혀 있었다. 한 판매원 누나가 내 손가락의 상처를 발견하고 밴드를 붙여 주겠다고 했다. 나는 왠지 쑥스러우면서도 이 누나가 상품을 팔려는 의도적인 행동이 아닌가 하는 불신이 조금 들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밴드만 붙이고 그 누나의 상점을 바로 벗어나 멀리 떨어진 다른 가게에서 반찬통 하나를 샀다. 

 



왠지 그 누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누나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아니든지 간에 나의 상처난 손가락은 그 누나의 눈에 띄었고 그 누나는 정성껏 밴드를 붙여 주었다. 그러나 나의 쑥스러움 반 의심 반, 그런 애매한 마음은 나의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지금 같아선 그런 미묘한 감정 제껴두고 그 누나에게서 반찬통을 샀을 것이다. 어쩌면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 누나의 마음을 진심으로 간직하기 위해 반찬통은 일부러 다른 곳에서 산 것 같다. 그래서 거의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판매원 누나가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창세기에는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물인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시인 김춘수 선생님의 에서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불렀을 때에 것이 꽃이 되었다고 한다.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아담이 주위에 그저 뛰어 다니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물에 의미가 주어진다. 사람이 만물 속에서 관찰하지 않고 이름을 지어 주지 않으면 시인 김춘수의 에서 말하듯 그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안에 두신 이유는 어쩌면 몸짓에 지나지 않은 의미 없는 만물로 하여금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이름을 얻고 의미를 부여 받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고도의 생각을 하고 언어생활을 하는 인간은 만물을 관찰하며 오랫동안 지식을 축적하며 문명을 건설해 왔다. 하나님이 만물에 심어 놓은 진리를 캐내며 발짝 발짝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불완전하고 위험하기 까지 하는 인간을 세상에 두신 까닭은 무엇일까?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오른다. 어린 아이가 자라나면서 언어를 배우고 철이 들어가듯 인류도 수천년간 온갖 전쟁을 치루고 복잡한 역사를 거치며 나은 세상을 가꾸기 위해 하루하루 나아간다. 성장해 가는 인간은 고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환희를 느낀다.

 

 

인간의 그러한 변화무쌍함이 다양한 만물과 교류하며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함으로 세상은 아름다워 진다. 아무리 기가 막힌 세상이라도 인간과 같은 관찰자가 없다면 세상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창세기에 아담이 만물에 이름을 짓는 장면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는 의미 있는 일이다. 창조물이 진정한 창조물이 되는 순간인 것이다.  창조주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어쩌면 창조주의 아바타(?)라고 수도 있는 인간이 창조물의 특색을 끄집어 내어 이름을 지어줄 때에 창조주로서 흐뭇해 밖에 없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적행위를 상징하고 우주만물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관찰하고 발견해 가는 인간의 탐험을 뜻한다. 인간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존재의 의미를 확보한다. 오래 전에 지은 글쓴이의 시로 글을 마무리 한다.

 

 

존재를 위한 존재

 

그저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설악산 꼭대기 흔들바위도 어느 등산객의 손에

흔들려야 비로소 존재하는

 

아무리 예쁜 꽃도 나비가 찾아와 주지 않고

주는 없으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저 살다가 가는 또한

진정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걸 지켜보며 가슴 조이는 분의 애탐이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

2019. 6. 25

 

  

  1. 몰입의즐거움ㅇ 2020.04.26 21:15 신고

    존재를 위한 존재... 머리 엄청 굴려야 뭔 말인지 알뚱말뚱하네요. 대단한 표현력이시네요

  2. 몰입의즐거움님 안녕하세요? 처음 그 시를 쓸 때는 그런 의미를 생각지 않았는데 마지막 연을 시작하면서 불현듯 제 머릿속에 스쳐서 그대로 담아 냈답니다. 이런걸 영감이라고 하나봐요. 누구나 영감이 있는데 담아내지 않을 뿐이지요.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보고

 

 

청상과부인 어머니와 사는 어린 옥희라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1960년대 흑백 영화이다. 대충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옥희는 역시 과부인 친할머니와도 함께 산다. 어느 옥희 엄마의 죽은 남편의 친구가 옥희의 사랑방에 하숙을 들어오게 된다. 남자는 옥희를 매우 귀여워 주고 놀아준다. 옥희는 아저씨를 아빠와 같이 따르고 좋아한다.

 

옥희의 엄마는 애초부터 남자가 집에 들어설 때부터 부끄러워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엄마는 수절을 지키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며 산다. 하지만 시대 상황은 이미 과부가 재가해도 아무 흠이 되지 않는 시대였다. 오히려 수절을 지키는 것을 바보라고 정도 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옥희의 엄마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자신을 억누르며 하나로 족하다고 한다.

 

수개월이 흐르고 사랑방 손님은 드디어 옥희 어머니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쪽지에 적어 옥희를 시켜 그녀에게 전달한다. 그걸 읽은 옥희 엄마는 심장이 마구 뛰며 일이라도 듯이 어쩔 몰라 한다. 하지만 역시 속마음과는 다르게 거절을 한다. 거절 당한 사랑방 손님은 술에 취해 들어오고 목이 말라 물을 찾는데 옥희 엄마가 물을 건네자 아저씨는 그만 와락 옥희 엄마를 끌어 안는다. 그녀는 당황하며 품을 뿌리쳐 달아난다.

 

 

어느 사랑방 손님이 피치못할 사정이 생겨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것으로 그들의 인연이 끝이 나는 알았다. 하지만 옥희가 산토끼 노래를 부르며 엄마에게 하는 말이 아저씨가 나중에 찾아 오겠다고 한다. 멀리 기차를 타고 떠나는 아저씨를 향해 모녀는 손을 흔든다.

 

청상과부인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 사이에 옥희라는 아이는 사이에 없어서는 안되는 매개체이다. 옥희라는 여자아이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사랑방 손님은 또한 옥희의 엄마에 대한 사랑이 서서히 어쩌면 불현듯 오른다. 그에 못지 않게 옥희 엄마도 사랑방 손님에 대한 마음이 억제하면 억제할 수록 올랐을지 모른다.

 

이별의 장면으로 영화를 마무리 하지만 옥희가 아저씨의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어머니에게 전달하게 함으로써 미래의 재회를 암시하는 해피엔딩이 되었다. 이별이라는 쌔드엔딩의 장면에 재회의 약속이라는 하나를 찍음으로써 영화를 보고 나서 흐믓한 기분을 느끼게 주었다.

 

영화는 역시 끝이 좋아야 한다. 글을 맺는 시간에도 영화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다.

 

----

2019. 6. 23

 

 

 

 

건물청소업 - 전기공사 - 우체국 - 치과기공 - 옷수선

 

위 직업들은 미국에서 26년간 살면서 했거나 하고 있는 직업이다. 이 중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종사하고 있는 직업은 12년이 넘은 옷수선인데 미국사람들이 워낙 손재주가 없다보니 비교적 손재주 있는 한국사람들이 잘 하는 옷수선이 먹고 사는데 괜찮은 기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옷수선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가고자 머릿속은 다른 데 가 있다. 기술 좋으신 어머니가 함께 하시기에 유지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은연중 나는 불안하다. 나이 많으신 엄마가 언젠가 일을 못하시게 될거란 생각은 나를 다른 일을 꿈꾸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다른 일을 꿈꾸게 하는 것은 글쓰기와 코딩을 좋아하는 내가 이 두 가지로 부의 추월차선, 즉 단시간에 많은 돈을 벌어 좀 더 젊은 나이에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누리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이미 작년부터 수익형 블로그인 티스토리에 에드센스 광고를 붙여 나만의 글을 올리고 유튜브에 내 글을 낭송하여 올리고 있다. 

 

그렇게 한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유튜브 구독자는 고작 14명이고 에드센스 광고 수익은 한 달에 많아야 20달러 이다. 블로그는 거의 수익이 나오지 않고 내쉬빌 한인 네트워크라는 웹사이트에서 그나마 수익을 내고 있는 형편이다. 글과 코딩으로 나의 생계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현재 나의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 글도 그렇고 코딩도 그렇고 수준 높은 단계에 오르지 못한 현 시점에서 매일 공부하고 연습해 나아가야 한다.

 

 

글에 있어서는 한글 뿐 아니라 영어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어야 글로벌 시대에 훨씬 넓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 코딩은 이 글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인데 코딩 학습이 좀처럼 진도가 나아가지 않는다. 글이 좀 더 세련되고 풍부해 지려면 독서도 많이 하고 여행도 좀 다녀야 겠는데 옷수선으로 거의 모든 하루를 보내는 나로선 시간이 빠듯하다.

 

내 나이 사십대 중반, 글쓰기와 코딩을 내 평생직업으로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돈벌기 쉬운 시대라 하는데 뭔가 잡힐듯 하면서도 좀처럼 잘 안되는 이 상황은 다시금 옷수선에 매달리게 한다. 옷수선 일을 좋아 했다면 옷수선을 좀 더 배울텐데 아무래도 그러지 않는 걸 보면 옷수선은 내 길이 아닐듯 싶다.

 

독서, 글쓰기, 영어, 코딩 - 이 네가지를 매일 갈고 닦으면 언젠가 임계점을 넘을 날이 오겠지. 그래도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옷수선이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 내 삶을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꿈으로 나아가는 이 과도기에 옷수선이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기 싫었던 옷수선이지만 꿈을 향한 징검다리인 것이다. 그래서 싫지만 고맙다.

 

----

2019. 6. 18

  1. 몰입의즐거움ㅇ 2020.04.26 21:23 신고

    임계점을 넘어 특이점이 오신거 같아요 ^^

  2. 몰입의 즐거움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현재로선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사슴, 애만 놓고 가지요

 

 

뒤뜰에 계시던 우리 엄마가 화들짝 놀라며 집으로 뛰어 들어 오신다. 바로 뒤뜰 나무 밑에 태어난 아기 사슴이 혼자 엎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집 뒤뜰엔 사슴 같은 동물이 가끔 와서는 엄마가 가꾸시는 텃밭을 망가뜨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몸까지 풀고 것이다.

 

어미 사슴이 급했는지 새끼를 사람 사는 곳에 겁도 없이 놓은 것이다. 동생이 잔디를 깎고 남은 풀을 나무 밑에 부어 놓았는데 이불 위에 편안히 엎어져 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아기 사슴 곁으로 다가가도 아기 사슴은 위협을 느끼는지 가만히 있다.

 

처음에 우린 새끼가 장애가 있어서 어미 사슴이 버리고 알았다. 그래서 동물보호소(Animal Control) 전화 했더니 하루 안에 어미가 새끼를 데리러 거라고 한다. 어쨌든 어미가 자식을 혼자 우리 집에 정도로 사람을 믿는구나 했다.

 

 

다음 뒤뜰을 내려 보니 과연 새끼가 사라졌다. 물론 어미가 데리고 갔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동생이 출근을 하려고 차에 타고 어머니가 창으로 아들의 출근을 지켜 보는데 도로 건너편에서 우리 쪽으로 어느 어미 사슴이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다.

 

장면을 보자 마자 어머니가 생각하시길 고마워서 인사하러 왔구나? 그렇게 한참을 쳐 보더니 멀리 껑충껑충 사라진다. 사슴에게 믿음이라는 정신작용이 발생할 있는지 모르나 어떤 본능적 안심이라도 들었나 보다. 그리고 감사라는 것도 사슴에게는 우리집을 뚫어져라 쳐 봄으로 고마운 이라는 찜이라도 두는 것일까?

 

바로 며칠 전엔 어미 사슴이 새끼 사슴을 데리고 뒤뜰에 나타났다. 새끼의 탯자리를 보러 왔는지 텃밭에 먹을 것을 얻으러 왔는지 아무튼 확실히 새끼 사슴은 어미의 품으로 돌아갔음을 확인할 있었다. 이렇게, 태어나는 모든 것은 어미의 품이 필요하다.

 

----

2019. 6. 10

 

      

 

이제 내 나이 40대 후반에 접어 들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 좋아하는 나이는 적어도 60은 되어야 한다. 나이에 민감하다는 것은 아직 젊다는 것이다. 그런데 40대, 그것도 40대 후반이라는 현실에 아직 미혼인 나로선 이제 결혼같은 건 내려 놓아야 한다는 체념 섞인 말이 나온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은 옷수선이다. 혼자 가게에서 모든 일을 해 낼 수 있다면 나의 미래가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어려운 드레스와 양복을 하시기에 우리 가게가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옷수선 가게가 되었다. 이렇게 어머니 없이는 이 가게가 제대로 돌아 갈 수가 없다.

 

최근 일주일 넘게 이 마음이 지옥을 경험한 이유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하고 일흔이 훌쩍 넘으신 어머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나의 처지에 어떤 위기의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결혼 할 수 있는 확률은 줄어들고 그럼 여자친구라도 사귈까 해도 미국의 각자 격리된 문화적 환경상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런저런 이유로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여 제 때에 풀지 못하자 나는 가게 손님에게 대하는 태도가 아주 좋지 못했고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손님들이 내 눈치를 보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이런 내 자신이 결혼하면 잘 살까? 글쎄올시다. 신앙인으로서 믿음은 내 던져졌고 마음은 강퍅해 졌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짝을 주시지 못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은 나이가 많아서 하는 게 아니라 성숙했을 때 하는 것이리라. 사랑도 성숙해야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정욕에 의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동물의 짝짓기와 다름이 없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에 관한 구절로 이 글을 맺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2019. 5. 1

 

'짭짤한 문학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기싫은 옷수선, 하지만 고마워  (2) 2019.06.18
사슴, 애만 놓고 가지요  (0) 2019.06.11
마음의 폭풍이 지나간 후  (0) 2019.05.01
경찰! 움직이지마!  (0) 2019.04.11
단점(短點)에 대한 고찰  (0) 2019.04.10
한나 누나 고마워!  (0) 2019.04.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