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의 풍조에 표류하다 - 가위눌린 후
2017. 9. 15. 19:41ㆍ짭짤한 문학/수필 ::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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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의 풍조에 표류하다
가위눌린 후
지금 시각 새벽 3시 18분.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좁은 내 방에서 비몽사몽간에 귀신과의 피 튀기는 싸움이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꿈은 다음과 같다. 어느 주유소 였던거 같다. 밤 시간에 어떤 숫자를 클릭하여 끌어다가 어디에 붙이니 그 액수만큼 나의 돈이 되는 것이었다. 마치 컴퓨터에서나 하듯 나는 어느 주유소에서 그렇게 몇 센트씩 끌어다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많이 늦은 나이에도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당연히 결혼도 못한 나로서 음란의 유혹은 당연한지 모르겠다. 어젯밤 한동안 하지 않던 온라인 매칭 사이트를 기웃 거리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잠이 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 시대에 믿음을 잃은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권사님이신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나는 매주 교회에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글 좀 쓴다고 내 머릿속엔 알량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고집스런 내 생각들로 가득찼고 어느새 맑고 순수했던 신앙의 자리는 회색빛 나의 생각, 아니 어쩌면 음란한 세대에 떠돌아 다니는 귀신이 주는 생각들이 점령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주유소 꿈을 꾼 뒤 나는 어느 다락방으로 옮겨져 그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
스르르 나는 약한 가위에 눌리기 시작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나는 이불을 끌어다 머리까지 덮었다. 방이 출렁이는걸 느꼈고 내 방에 귀신이 가득 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공포의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굳어진 나의 입을 벌려 주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문과 같이 되어 버린 주기도문으론 역부족 이었다. 귀신들은 필사적으로 내 이불을 잡아 당겼고 내 방은 여전히 출렁대고 있었고 내 머리는 쭈볏쭈볏 소름이 끼치는게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씨름을 하는데 순간 내 입에서 찬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찬양은 다음과 같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 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이 찬양을 계속 수 없이 부르고 나니 어느새 가위도 풀리고 소름 끼치는 것도 사라지고 용기를 내어 일어나 불 켜고 이렇게 앉아 있다. 나는 언제부턴가 예수라는 이름을 부끄러워 하고 있었고 거부감까지 들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교회를 다니니 나의 이중성만 키우는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도 의심과 회의로 괴로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나는 그 찬양의 나머지 가사들을 찾아 보았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나는 위 찬양에서 긍휼이란 단어에 마음이 갔다.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矜恤 : 불쌍히 여김 / 근심함) 믿음을 잃고 음란한 풍조에 휩쓸려 음부(陰府 : 축복받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로 걸어가는 나에게 아직 긍휼함을 가지고 계시는 구나.
똥같은 생각들로 가득 찬 나는 다음과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할거 같다.
닥치고 말씀닥치고 기도닥치고 찬양
이 목숨이란 것이 수영장 물속에서 1분도 못 버티고 죽겠다고 고개를 내미는 가련한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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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15 [4:5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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