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1. 20:17ㆍ짭짤한 문학/수필 :: Essay
바알과 야훼
NaCl
인간의 존재가 언제부터인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삶의 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고통이 따랐는데 그 문제 해결의 처방으로 인간의 고통에 초점을 두었던 신앙이 농경사회에서 발생한 바알신앙이다. 반면 그 고통의 근원에 죄가 있음을 깨닫고 그 죄에 초점을 맞춘 신앙이 목축사회에서 발생한 야훼신앙이다.
아마도 목축사회에서는 염소나 양을 도축하기 때문에 살생에 대한 죄의식이 만연했을 것이다. 실험실 생쥐를 무수히 잡아온 연구원도 그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목축사회보다는 노동이 갑절이상 필요하고 힘들었을 것이고 자연히 고통이라는 개념이 구성원들 사이에 팽배했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농사를 짓는 가인이 신께 수확물로 제사를 드리고 목축업을 하는 아벨은 가축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데 신은 가인의 제사를 열랍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피의 제사를 받아들이신다. 곡식의 낟알과 양의 피. 그 두 제물은 인류역사의 큰 두 줄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곡식의 낟알은 풍요함을 상징하고 양의 붉은 피는 희생을 상징한다.
인간의 문제는 크게 육체적인 문제와 정신(영적)인 문제로 나뉜다. 곡식의 풍요함은 육체적 안락으로 이어지고 아이를 많이 낳아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성적인 문란함이 허용되었다. 그런 쾌락이 인간의 고통을 잊게 해 주는듯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신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인간의 정신, 영적인 문제를 만지는 아벨의 피의 제물을 받으신건 아니겠는가.
인간의 생명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된 가축들. 배를 가르며 내장을 끄집어 내고 각을 뜨는 작업은 인간의 정신에 죄라는 인식이 발달되도록 한다. 그런 목축사회 인간들의 신에 대한 인식은 바로 율법의 엄격함으로 이어지고 작은 죄라도 범하였을 경우 그 고통은 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싯어야 평안할 수 있었다. 그 죄에 대한 민감함으로 신에게 재물을 바칠 때에 양이나 염소의 희생이 그들의 죄를 싰는다고 믿었다.
인간은 배부르고 모든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만일 해결된다면 신은 가인의 제사도 받아 들이셨을 것이다. 신은 아벨의 제사를 받아 들임으로 인간의 문제는 그런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알려 주신 것이다. 작은 목축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죄에 대한 민감함을 심어 주고 그 죄를 해결하여야만 인간의 고통이 풀어져 구원에 이름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한 평범한 목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평범하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말한다. 그의 기적 이야기는 그런 진정한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의 기적도 진정한 그 무엇인가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거짓되고 긍휼함이 없는 경우엔 그런 기적이 일어 나지 않는다. 신은 아벨의 제물을 통해 인류의 구원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예표로 알려 주셨고 결국 그 목수의 순종과 희생을 이룸으로 인류 최대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 것이 인류 최대의 제사가 되는 이유는 제물로 바쳐진 피가 신의 속성을 닮은 진정한 인간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그 사람을 오래 전부터 예비하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을 때 신이 한 양을 예비해 놓으셨듯이 신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을 아빠라고 부른 한 사람, 그래서 결국 신의 아들, 다시 말하면 신의 현현("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 요한복음 10:30)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 육체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한다.
바알은 고통을 회피하지만 야훼는 고통을 맞이한다. 그래서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인 죄의 사슬을 끊는다. 바알을 좇아 그저 고통을 잊으려 쾌락과 돈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죽을 때까지 진통제를 맞는 셈이고 야훼를 좇아, 즉 그 목수의 피의 제사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근원적인 치유를 맞보게 될 것이다. 지금의 유대인들은 야훼를 좇기는 하였으나 그 평범했던 목수의 피는 받아들이지 않아 끊임없이 고통 가운데 있다. 성경은 온 열국이 구원을 얻고 나중에 유대인이 구원을 받을 거라 예언을 했다. 현재 유대인들의 그 목수를 받아들이는 현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 말은 열국의 구원이 그 한계에 거의 닿아 있다는 것이다. ISIS, 이란, 북한을 보면 그 한계상황이 거의 정점에 와 있음을 느낀다. 이 모든 구원역사는 신의 주관하에 있다고 믿는다면 과연 대한민국은 이스라엘과 비교하여 어떤 나라일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건국이념은 ISIS, 이란, 북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불량국가를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의 길로 돌이키게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시작에서, 대한민국은 구원의 끝에서 신의 도구로써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46:10,1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고,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불렀다. 내가 말하였으니, 내가 그것을 곧 이루겠으며, 내가 계획하였으니, 내가 곧 그것을 성취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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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8 / 개천 5912 / 主後(주후 : After Christ) 2015. 6. 21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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