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2. 20:38ㆍ짭짤한 문학/수필 :: Essay
|
벌레와 오래 살다 보니
내 방 벽에는 기어다니는 벌레가 가끔 출몰한다. 처음 목격한 것은 아마도 언 7년 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나 싶다. 그 생김새가 정말 징그럽고 민첩하기 까지 했다. 보이는 대로 사전이나 수첩으로 쳐서 짜부를 시켰는데… 여기서 잠깐, 짜부가 어찌 보면 일본어 같은데 검색을 해 보니 찌부러지다, 짜부러지다와 연관된 표준어라고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그 이름 모를 벌레가 최근에도 벽에 스스로 나타났다.
며칠 전 밤엔 오른쪽 귓속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서 잠을 깬 적이 있는데 그 날 하루 종일 내 귓속에 벌레가 들어갔나? 불안해 졌다. 하지만 귓밥을 파고 이틀이 지나자 더 이상 부스럭 소리가 나지 않아 안심을 했다. 어쩌면 그 벌레가 내 귓속에서 초상을 치러 조용한지도 모른다.
벌레는 왜 징그럽게 생겼을까? 예쁘게 생겼으면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 들 텐데. 언젠가는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벌레가 의자 다리를 타고 내 다리를 기어 오르고 있지 않는가? 기겁을 하여 손으로 떼어 냈는데 7년이 지나도록 나는 살충제를 전혀 뿌린 적이 없다.
귀찮은 탓도 있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방의 생태계가 나름 안정적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화분이 창문 옆에 놓여 있어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균형이 이루어 지고 벌레와 내가 살기에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며 벌레를 잡아 먹는 거미도 서식하는 바 먹이사슬로 개체 수를 조절하고 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는데 내 머리 바로 위 천장에서 스파이더 맨이 줄을 타고 내 입을 향하여 죽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스마트폰을 떨어뜨리고 나는 침대에서 탈출을 했다. 그 거미는 아직도 내 침대 어느 구석 어디선가 자리를 잡고 있는지 모른다.
살충제는 내키지 않고 차라리 이대로 벌레들과 공생하는 길을 택했다. 요즘 벽에는 그 벌레가 그 전처럼 자주 출몰하지는 않는다. 그 벌레의 천적이 우세한 모양이다. 그 징그럽던 벌레도 이젠 그리 징그럽지가 않다. 익숙해지면 그 비쥬얼에 대한 나의 인식도 희석이 되나 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벌레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본다. “여러 무척추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또한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거나 열심인 사람을 비유하는 말.” 정도이다. 개미를 봐도 그저 일만 죽어라 하는 그 재미없는 삶.
나 또한 벌레가 아닌가? 몸집이 커서 척추가 있는 벌레. 걸레가 자신을 더럽히는 희생으로 남을 깨끗하게 하는 존재라면, 벌레는 이 세상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잘 적응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아닌가? 결국 이 방에는 벌레로 가득하다. 이 글을 열심히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하여..
2020. 9. 2 [6:30 AM]
'짭짤한 문학 > 수필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음은 최고의 명약 - 어린 조카 대니의 웃기는 언어생활 (2) | 2021.01.10 |
---|---|
[사진과 글] 서울 롯데월드타워에 가다 (0) | 2020.12.21 |
코로나 이 적막함에 나비가 찾아와 말을 걸다 (2) | 2020.05.25 |
구글 애드센스(Adsense) 광고 정지를 당하다 (0) | 2020.05.20 |
[감상문] 물증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 박상우 시인 (2) | 2020.05.08 |